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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기도의 방향을 다시 묻다.

by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2026. 1. 9.

기도에 대해 생각할수록, 기도는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나는 기도에 관한 확정된 공식이나,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해답을 쉽게 말할 수 없다. 각 사람의 삶은 다르고, 각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소원도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26-27절은 그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 기도의 제목이 단순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과 상황과 시간은 얽혀 있으며, 그 위에는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 놓여 있다. 그래서 기도는 종종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내가 기도를 못 해서가 아니라, 내 삶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기도의 본질이 원래 그만큼 깊기 때문에 성령님의 중보가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병상 앞의 기도가 그렇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은 낫게 해달라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기도가 너무도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움을 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생명의 길이와 죽음의 때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 마음에 주시는 소원을 따라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구할 수 있다. 어떤 기도는 병이 낫는 방식으로 응답되고, 어떤 기도는 더 오랫동안 살게 되는 방식으로 응답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기도는, 그 병으로 죽는 것으로 응답되기도 한다. 이것이 기도를 무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도의 자리를 더 진실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병든 이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고백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특히 병자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병에 걸렸다면, 내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선뜻 감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마음도 이해된다. 그만큼 우리는 “살게 해달라”는 간구 속에 서로의 체온을 담는다. 기도는 신학만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서 8장 27절은 기도의 중심을 다시 세운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시는데,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의 무게중심이 바뀐다.

나는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의 중보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류하는 사람이 된다. 나의 간구는 때로 생명을 붙드는 방향이 될 수 있고, 때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생명을 놓아드리는 방향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기도를 선택했느냐”보다, 성령님이 이 기도를 어디로 데려가고 계시느냐이다.

나는 또한 삶을 바라보는 큰 틀을 잊지 않으려 한다.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있고, 사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목적이 다 이루어지는 그날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는다. 이 짧은 인생의 순간은 영원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내 기도의 방향은 조금씩 정돈된다.

내 기도의 결론이 “반드시 낫게 해달라”로만 고정되지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니 포기하자”로 단순화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성령님이 나의 마음을 다루시고, 하나님의 뜻과 내 소원을 겹치게 하시며, 내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탄식으로 기도하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해본다. 기도에는 정답이 없다. 그렇다고 기도가 방향 없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성령님의 중보가 기도의 방향을 만든다.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도,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 성령님과 동행한다면, 매 순간 무엇을 구해야 할지 완벽히 아는 사람은 되지 못해도, 무엇을 향해 기도해야 하는지는 점점 알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알아감 자체가, 이미 응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